서면 한 장이 드러낸 구조 — 싸우지 않는 사법부 ⑥
제청권이라는 방파제
2026년 8월 18일, 조희대 대법원장이 대법관 후보 2명을 서면으로 제청했다. 손봉기 대구지법 부장판사(사법연수원 22기)와 김성수 서울고법 부장판사(24기). 손봉기는 노태악 전 대법관의 후임이고, 김성수는 9월 7일 퇴임하는 이흥구 대법관의 후임이다 (오마이뉴스, 2026-08-18).
서면이었다. 대면이 아니었다. 이것이 사건이 됐다.
청와대는 "헌정사 초유의 사태"라고 했다. 성기홍 홍보소통수석은 "협의를 건너뛴 유례없는 일방 통보"라고 규정했다. 김민석 민주당 대표는 조희대를 "해방 이후 최악의 대법원장"이라 불렀다. 김승원 법사위 여당 간사는 "제2 사법쿠데타"라고 했다. 이성윤 최고위원은 "탄핵 사유는 이제 충분하다"고 선언했다 (디지털타임스, 2026-08-19).
서면 한 장이 불러온 나비효과는 굉장했다. 청와대가 펄쩍 뛰었다.
헌법 제104조 제2항 —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2026년 8월 18일, 조희대 대법원장이 대법관 후보 2명을 서면으로 제청했다 — 168일째 공석이었던 자리다.
청와대는 "헌정사 초유의 사태"라 했고, 여당은 탄핵을 거론했으며, 법원행정처 폐지까지 꺼냈다. 8월 28일, 청와대는 손봉기 후보의 임명동의안을 거부하고 재제청을 요구했다.
법원조직법 개정(법률 제21451호)으로 대법관 정원이 14명에서 26명으로 늘어난 상황에서, 증원분 12명의 제청권은 대법원장에게 있다.
<이 글의 질문>
제청권이 흔들리면, 사법부의 인적 구성은 누가 결정하게 되는가.
7개월의 교착
시계를 되돌려서 순서대로 보자.
2026년 1월 21일,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가 4명을 추천했다. 김민기 수원고법 판사, 박순영 서울고법 판사, 손봉기 대구지법 부장판사, 윤성식 서울고법 부장판사. 추천위의 기능은 여기서 끝난다. 법원조직법 제41조의2 제8항에 따라, 추천이 이루어지면 해당 추천위는 해산된다 (같은 기사).
추천 이후의 절차는 헌법이 정한다. 헌법 제104조 제2항: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제청은 대법원장의 권한이다. 임명은 대통령의 권한이다. 그 사이에 국회 동의가 있다. 세 기관이 각자의 역할을 나누어 가진 구조다.
교착은 제청 이전에 발생했다. 청와대는 김민기를 원했다. 우리법연구회 출신이며 여성이다. 이재명 정부 첫 대법관이라는 상징이 있었다. 조희대는 반대했다. 김민기의 남편 오영준이 현직 헌법재판관이라는 점이 이유였다. 재판소원 제도(법률 제21452호)가 시행되면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사이에 사건이 오가는데, 부부가 양쪽에 앉는 것은 이해충돌이라는 판단이었다 (헤럴드경제, 2026-08-20).
노경필 법원행정처장은 국회 법사위에서 이렇게 밝혔다. "협의는 했지만 합의는 못했다." 협의는 절차이고, 합의는 결과다. 합의 없이는 제청할 수 없다는 관행이 굳어지면, 대통령에게 거부권이 생긴다 (디지털타임스, 2026-08-19).
대법원 쪽은 윤성식을 선호했으나, 윤성식이 내란전담재판부에 배치되면서 후보에서 사실상 빠졌다.
노태악 전 대법관이 퇴임한 날은 2026년 3월 3일이다. 서면 제청이 이루어진 8월 18일까지 공석 기간은 168일이다 (같은 기사).
제청권은 이렇게 설계됐다
헌법이 대법관 임명 절차를 세 기관에 나눈 것은 우연이 아니다.
대통령이 단독으로 대법관을 임명하면, 사법부는 행정부의 인사 부서가 된다. 국회가 단독으로 선출하면, 사법부는 다수당의 도구가 된다. 대법원장이 단독으로 결정하면, 사법부는 수장 개인의 영역이 된다. 어느 한 기관도 단독으로 대법관을 만들 수 없게 한 것이 헌법 제104조의 구조다.

제청권은 이 삼각 구조의 첫 단추다. 대법원장이 후보를 골라 대통령에게 보내고, 대통령이 국회에 임명동의안을 제출하고, 국회가 동의하면 대통령이 임명한다. 순서가 있다. 대법원장이 제청하지 않으면 대통령은 임명할 수 없고, 국회의 동의가 없으면 대통령의 임명은 효력이 없다.
이 순서 자체가 견제다. 제청권은 대법원장에게 주어진 거부권이 아니라 제안권이다. 대통령은 제청된 후보를 임명하거나 임명하지 않을 수 있다. 국회는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 대법원장에게 "이 사람을 제청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 헌법적 근거는 없다. 제청권의 핵심은 후보를 고르는 판단이 대법원장에게 있다는 것이다 (뉴데일리, 2026-08-22).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1835)에서 독립된 사법부에 가장 오래 멈춰 섰다. 다수의 열정이 법을 밀어붙일 때 '아니오'라 말할 수 있는 기관. 선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수에 맞설 수 있다. 제청권은 사법부가 행정부와 개인 사이에 독립된 완충재로 서기 위한 장치다. 대법관의 구성이 전적으로 행정부의 의지에 따라 결정되면, 사법부는 중간 기관이 아니라 행정부의 연장이 된다.
관행은 있었다. 대법원장과 대통령이 사전에 만나 후보를 조율하는 관행. 그러나 관행이 헌법을 이긴 적은 없다. 한상희 건국대 명예교수는 이렇게 지적했다. "국민들의 일상을 좌지우지할 대법관을 임명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것이 '관행'이라고 지칭되는가." 비공개 조율 자체의 투명성 부재를 짚은 것이다 (헤럴드경제, 2026-08-20).
관행이 의무로 변할 때
7개월간 일어난 일을 정리하면 이렇다. 청와대가 원하는 후보가 있었다. 대법원장이 다른 후보를 골랐다. 청와대는 대법원장이 자신의 선호를 따르지 않은 것을 "협의 파기"로 규정했다.
여기서 질문이 갈린다. 협의란 무엇인가. 양쪽이 의견을 주고받는 것인가, 아니면 한쪽이 결론을 정하고 다른 쪽이 따르는 것인가.
전자라면, 협의가 결렬됐을 때 대법원장이 자기 판단으로 제청하는 것은 제청권의 행사다. 후자라면, 제청권은 대통령의 선호를 대법원장의 서명으로 포장하는 절차에 불과하다.
더퍼블릭의 법리 분석이 이 구조를 정리했다. "'합의되지 않은 후보는 제청할 수 없다'는 관행이 굳어질 경우, 대법원장의 제청권이 대통령의 사전 동의에 종속될 수 있다" (더퍼블릭, 2026-08-20).
하이에크가 《자유헌정론》(1960)에서 경고한 전환이 이것이다. 법의 지배(Rule of Law)는 법이 일반적이고 예측 가능하며 평등하게 적용될 때 성립한다. 통치자가 특정 결과를 내기 위해 법적 절차를 도구로 쓰는 순간, 법의 지배는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로 전락한다. 헌법 제104조의 3단계 절차를 대통령 1인의 사전 동의로 축소하는 것이 그 전환점이다.
8월 22일까지는 보도의 수준이었다. 청와대가 손봉기의 제청을 반려하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것, 2명 중 김성수만 선별적으로 임명동의안을 제출하는 방안이 거론된다는 것 (펜앤마이크, 2026-08-22).
8월 28일, 그것이 실행됐다. 청와대는 손봉기의 임명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지 않았다. 김성수만 제출했다. 조희대 대법원장에게는 다른 후보를 다시 제청하라고 요청했다. “절차적 완결성 부족”이 공식 사유였다 (한겨레, 2026-08-28). 헌정사에서 대통령이 대법원장의 제청을 반려하고 재제청을 요구한 선례는 없다. 헌법 제104조는 대통령에게 “제청을 반려할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 임명하거나, 하지 않거나다. 그런데 그 사이에 “마음에 안 드니 다시 가져와라”가 들어갔다.
현직 판사들의 익명 반응이 나왔다. “납득 안 된다”, “특정인을 원하는 것이면 제청권 침해다” (뉴스1, 2026-08-28).

피고인이 재판관을 고른다면
이 구조를 한층 더 심각하게 만드는 사실이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공직선거법 위반, 위증교사 등 5건의 형사재판 피고인이다. 재판은 전부 정지되어 있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의 질문은 단순하다. "어떤 피고인이 자기 재판을 맡을 대법관을 협의해서 고르느냐."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법리 질문이다 (펜앤마이크, 2026-08-20). 로마법의 원칙 Nemo iudex in causa sua (누구도 자기 사건의 재판관이 될 수 없다) 의 변형이다. 피고인이 직접 재판관이 되지는 않더라도, 재판관 인선에 관여할 수 있다면 원칙은 무력해진다.
실제로 청와대가 손봉기 부장판사를 거부하고 김민기 수원고법 판사를 선호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대통령이 특정 후보를 밀고 특정 후보를 거부할 수 있다고 인정하면, 피고인 대통령이 자기에게 유리한 재판관을 골라 앉히는 길이 열린다 (경향신문, 2026-08-19).
여기에 대법관 증원이라는 변수가 겹친다. 법원조직법 개정(법률 제21451호)으로 대법관 정원이 14명에서 26명으로 늘었다. 증원분 12명의 제청권은 대법원장에게 있다. 대통령이 원하는 후보를 대법원장이 제청해야 한다면, 제청권은 대통령의 의지를 대법원장의 서명으로 포장하는 절차가 된다. 5건의 형사재판 피고인이 자기 사건을 심리할 대법원의 구성을 사실상 결정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제거하는
탄핵이 재점화됐다. 이성윤 최고위원은 "탄핵 사유는 이제 충분하다"고 했다 (같은 기사). 서면 제청이 탄핵 사유가 될 수 있는가. 전학선 교수(한국외대 법학)는 "탄핵사유는 전혀 안 된다. 헌법을 위반한 게 뭐가 있나"라고 반박했다. 조용현 변호사는 "종전 관행과 다르다고 법적 문제가 된다거나 탄핵사유라는 건 지나치다"고 했다. 한변(한반도인권과통일을위한변호사모임)은 "대면 제청을 강제하는 헌법이나 법률 규정은 없다"고 성명을 냈다 (뉴데일리, 2026-08-20).
한변의 성명이 패턴을 정확히 짚었다. "제청을 미루면 지연이라며 탄핵을 거론하고, 제청하면 방식을 문제 삼아 또다시 탄핵을 겨눈다." 제청하든 하지 않든 탄핵이 따라오는 구조다.
법원행정처 폐지론이 재가동됐다. 김승원 의원은 8월 21일 “법원행정처를 폐지하고 법원사무처로 전환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비법관을 포함한 사법행정위원회를 신설하고, 판사회의를 통한 법원장 선출제를 도입하겠다는 구상이다. 법관징계법 개정안(정직 상한 1년→2년), 변호사법 개정안(대법관 퇴직 후 5년간 대법원 사건 수임 제한)도 함께 추진된다 (뉴스1, 2026-08-21). 8월 24일에는 서영교 법사위원장이 탄핵을 “가야 할 길”이라 했다. 김민석 대표는 추천위원회 구성 규정(법원조직법 제41조의2 제2항) 개정을 원내에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한겨레, 2026-08-24).
이건태 의원은 "대통령의 임명권에 대한 도전"이라며 국회가 임명동의안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뉴스핌, 2026-08-19). 이건태는 대장동 사건에서 이재명 측 법률 대응에 관여했던 변호사 출신 의원이다. 대장동 사건의 법률 대응에 관여했던 의원이, 대법관 인선에서 대법원장의 제청권 행사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해충돌의 구조가 여기서도 보인다.
유인(incentive)의 설계
소웰은 《갈등의 비전》(1987)에서 제도의 성패를 결정하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사람의 도덕이 아니라 유인의 방향이라고 보았다. 유인이란, 어떤 행동을 하면 이익이 되고 하지 않으면 손해가 되는 구조를 말한다.
제청권에 어떤 유인이 설정되어 있는지 보자.
대법원장이 독자적으로 제청하면 탄핵 압박과 제도 해체가 뒤따른다. 대통령의 뜻에 맞추어 제청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유인 구조 아래에서, 다음 대법원장은 무엇을 계산에 넣겠는가. 독자적 제청이 안전하지 않다면, 대통령의 뜻에 맞추는 쪽이 안전하다. 제청권이 살아 있되 행사할 수 없는 권한이 되는 것이다.
뽑히지 않은 칼의 무게가 여기서도 작동한다. 칼을 뽑지 않아도, 칼집에 손을 얹으면 상대의 행동이 바뀐다. 탄핵이 실제로 통과하지 않더라도, 탄핵을 거론하는 것만으로 다음 대법원장의 계산이 바뀐다.
프리드먼의 질문을 적용하면 이렇다. 제청권을 대통령의 사전 동의에 종속시키면, 대법관 인선은 누구의 판단으로, 누구를 위해, 누가 결정하는가. 대법원장의 서명이 남아 있지만, 판단은 청와대에서 이루어진다. 프리드먼은 《자본주의와 자유》(1962)에서 권한과 책임이 분리되는 순간 그 제도는 작동을 멈춘다고 했다. 제청의 형식은 대법원장에게 있고 내용은 대통령에게 있다면, 제청권은 책임만 남고 권한은 사라진 껍데기가 된다.
사법부 권한 재편의 전체 그림
여당이 서면 제청 논란을 법원행정처 폐지로 연결한 것은 전술적 전환이다. 서면 제청 자체가 위법이 아니라는 점은 법조계의 지배적 견해다. 위법이 아닌 행위를 빌미로 제도 개편을 추진하는 구조가 보인다.
차진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대법원장을 존중하는 것은 개인이 아닌 한 나라의 사법부와 법치주의에 대한 존중이다." 법원행정처 폐지는 "사법부의 독립을 침해하는 것으로서 명백한 위헌"이라고 평가했다 (같은 기사).
지금까지의 구조를 놓으면 전체 그림이 드러난다. 법왜곡죄(법률 제21450호)가 재판의 내용을 위협하고, 대법관 증원(법률 제21451호)이 인적 구성을 한꺼번에 바꾸고, 검찰 권한 축소(법률 제21065호·제21490호·제21491호·제21857호)가 공소 유지 기능을 재편하는 위에, 법원행정처 폐지까지 얹으면 사법부의 자기 운영 권한이 남는 영역이 무엇인가. 재판권. 그것도 법왜곡죄 아래에서.
정부가 한 일은 적법한가
첫째, 대법원장은 대통령과 사전 협의해야 한다. 헌법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정했다. 임명권자가 제청된 후보를 수용할 수 없는 상황을 피하려면 사전 조율이 합리적이다. 서면 제청은 그 조율의 기회를 차단한 것이다.
둘째, 대법관 공백은 국민의 피해다. 168일째 공석이 이어지는 동안 대법원의 사건 적체는 심화됐다. 조희대가 7개월간 제청을 미룬 것 자체가 문제이며, 서면 제청은 그 문제에 대한 수습이 아니라 일방적 결정이다.
셋째, 김민기 후보의 배제는 합리적이지 않다. 남편이 헌법재판관이라는 이유로 대법관 후보를 배제하는 것은 법적 근거가 없는 자의적 판단이다. 이해충돌은 개별 사건에서 회피 제도로 처리할 수 있다.
대답하지 못하는 것
사전 협의가 합리적이라는 것은 맞다. 그러나 협의가 결렬됐을 때 누구의 판단이 우선하는가. 헌법의 문언은 명확하다. 제청권은 대법원장에게 있다. 대통령이 "이 사람을 제청하라"고 요구할 헌법적 근거는 없다. 협의와 동의는 다르다. 협의가 "대법원장이 대통령의 뜻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면, 제청권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공백이 국민의 피해라는 것은 맞다. 그러나 7개월의 교착에서 어느 쪽이 교착의 원인인지를 물어야 한다. 청와대가 추천위 추천 4명 중 특정 1명만을 고집한 것도 교착의 원인이다. 다른 후보를 수용할 수 있었다면 공백은 훨씬 짧았을 것이다. 공백의 책임을 대법원장에게만 지우는 것은 교착의 절반만 보는 것이다.
이해충돌이 개별 사건에서 회피로 처리된다는 것은 맞다. 그러나 재판소원 제도 아래에서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구조적으로 만난다. 개별 사건이 아니라 제도 자체가 양 기관의 접점을 늘린다. 부부가 양쪽에 앉는 것은 개별 회피로 해소되지 않는 구조적 긴장이다. 이 판단이 옳은지 그른지는 논쟁할 수 있다. 그러나 대법원장이 이 판단을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제청권이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 제청권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제청권 자체를 문제 삼으면, 제청권은 대통령이 수용할 수 있는 후보만 고를 수 있는 권한으로 쪼그라든다.
방파제의 조건
시금석은 간단하다. 이 논리가 대통령이 바뀌어도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가.
보수 정부가 들어섰다고 하자. 대법원장이 제청한 후보를 보수 대통령이 "사전 협의 없었다"며 반려하고, 여당이 "탄핵 사유"라며 공청회를 열고, 법원행정처 폐지를 추진한다면 — 지금 서면 제청을 비판하는 측은 같은 논리를 수용하겠는가.
버크는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1790)에서, 오래된 제도적 분업에는 한 세대의 설계자가 예측하지 못한 균형이 축적되어 있다고 했다. 대법원장이 후보를 고르고 대통령이 임명하는 헌법적 분업은 그 자체로 축적된 지혜를 담고 있다. 한 번의 정치적 충돌을 이유로 이 분업의 한쪽을 제거하면, 축적된 균형이 무너진다. 제청권을 무력화한 뒤에 남는 것은 대통령이 대법관을 고르고 여당이 추인하는 이단(二段) 구조다. 헌법이 설계한 삼단 구조는 사라진다.
제청권이 방파제로 작동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대법원장이 대통령의 선호와 무관하게 후보를 고를 수 있어야 한다. 둘째, 그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탄핵이나 제도 해체로 대응하지 않아야 한다.
첫째가 없으면 제청권은 형식이다. 둘째가 없으면 제청권은 위험이다. 제청은 했지만 탄핵으로 보복당할 수 있다면, 앞으로 대법원장은 대통령의 뜻을 먼저 확인할 것이다.

서면 한 장의 무게
조희대의 서면 제청이 최선의 방식이었는가는 논쟁할 수 있다. 사전 조율이 더 매끄러웠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법원 안에서도 나왔다. 그러나 방식의 아쉬움이 권한의 부정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서면 한 장이 도착했을 때, 이것을 "헌정사 초유의 사태"로 규정한 것은 청와대다. 탄핵을 거론한 것은 여당이다. 법원행정처 폐지를 꺼낸 것도 여당이다. 서면 한 장의 무게와 이 반응들의 무게를 저울에 올려 보라. 한쪽은 헌법이 부여한 제청권을 행사한 것이고, 다른 쪽은 그 행사에 대해 탄핵을 거론하고 법원행정처 폐지를 제안한 것이다.
대법관 제청권은 사법부가 자기 구성에 관여하는 마지막 방파제다. 법왜곡죄가 재판의 내용을 위협하고, 대법관 증원이 인적 구성을 한꺼번에 바꾸고, 검찰 권한 축소가 공소 기능을 재편하는 상황에서, 제청권마저 대통령의 선호를 추인하는 절차로 전락하면, 사법부에 남는 것은 판결문을 쓸 권한뿐이다. 누가 그 판결문을 쓰는지는 이미 다른 곳에서 결정된다.
법왜곡죄, 대법관 증원, 검찰 해체, 탄핵 압박, 변호인 출신 의원, 제청권 공격 — 이 여섯 갈래가 교차하는 사건이 있다. 그 한 사건이 큰 줄기다. 거기서 모든 것이 시작됐다.
참고 출처
- 대한민국헌법 제104조 제2항(1987.10.29. 전부개정)
- 법원조직법 제41조의2 제8항(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 해산 규정)
- 오마이뉴스 — 조희대, 대법관 후보 서면 제청 (2026-08-18)
- 디지털타임스 — 노경필 법원행정처장 "제청은 대법원장 권리" (2026-08-19)
- 디지털타임스 — 여권 반발·탄핵론·야당 반박 (2026-08-19)
- 경향신문 — 대법관 22명 임명 주도권 신경전 (2026-08-19)
- 더퍼블릭 — 헌법 104조, 제청 전 대통령 허락 받아야 하나 (2026-08-20)
- 펜앤마이크 — 이준석 "어떤 피고인이 대법관 협의해 고르냐" (2026-08-20)
- 뉴데일리 — 전 헌재 연구부장 "대통령 의중 고려 의무 없어" (2026-08-22)
- 헤럴드경제 — 조희대, 이례적 서면제청…대법관 공백 더 길어지나 (2026-08-20)
- 뉴스1 — 與 법사위 간사 "법원행정처 폐지하고 법원사무처로" (2026-08-21)
- 뉴스핌 — 이건태 "조희대, 대통령 임명권 도전…반드시 사법개혁" (2026-08-19)
- 파이낸셜뉴스 — 장동혁 "법원 겁박, 재판 재개하라" (2026-08-18)
- 한겨레 — 이 대통령, 손봉기 대법관 후보 반려…”절차적 완결성 부족” (2026-08-28)
- 뉴스1 — 대법관 제청 반려에…판사들 “납득 안 돼, 특정인 원하면 제청권 침해” (2026-08-28)
- 한겨레 — 민주당 법 개정·법원행정처 폐지·탄핵론 (2026-08-24)
- 파이낸셜뉴스 — 장동혁 “법원 겁박, 재판 재개하라” (2026-08-18)
- 사상가 인용: 토크빌 《미국의 민주주의》(1835), 하이에크 《자유헌정론》(1960), 소웰 《갈등의 비전》(1987), 프리드먼 《자본주의와 자유》(1962), 버크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1790)
헌법 제104조의 문언, 법원조직법 제41조의2 제8항, 관련 법률번호는 국가법령정보센터 원문으로 확인했다. 청와대·여당·법조계 발언은 보도에 따른 것이며, 발언의 전후 맥락은 해당 보도에 의존한다. 8월 28일 임명동의안 미제출과 재제청 요구는 청와대 공식 브리핑과 대법원 보도자료로 확인했다. 판사 반응은 뉴스1의 익명 인터뷰이며 대법원 공식 입장이 아니다. 서면 제청의 적절성에 대한 평가와 헌법적 권한의 존재는 별개의 문제임을 구별했다. 재제청 요구의 위헌 여부에 관한 헌법재판소 또는 법원의 확정 판단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