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뽑지 않아도 칼집에 손을 얹으면— 싸우지 않는 사법부 ④
뽑히지 않은 칼의 무게
법관의 독립은 한 가지 확신 위에 선다. 어떤 판결을 내려도, 그 때문에 자리를 잃지 않는다는 확신이다.
2026년, 그 확신이 시험대에 올랐다. 범여권 의원 112명이 조희대 대법원장 탄핵소추안 초안에 서명했다. 공청회가 열렸고, 정청래 민주당 대표가 자진사퇴를 연일 압박했다. 그리고 탄핵소추안은 의결되지 않았다. 법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범여권 의원 112명 탄핵소추안 초안 서명, 발의 정족수(재적 1/3) 초과
사유: 이재명 대통령 상고심 절차 위반·직권남용 등 6가지
공정사회포럼(처럼회) 탄핵 공청회 개최, 정청래 민주당 대표 자진사퇴 압박– 민주당 지도부 공식 거리두기
탄핵소추안 미의결
선례: 임성근 부장판사(2021)
헌정사 유일의 법관 탄핵소추 가결
<이 글의 질문>
의결되지 않은 탄핵도 후임 대법원장의 계산에 변수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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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있었나
범여권 의원 다수가 조희대 대법원장 탄핵을 추진했다. 2026년 2월, 13명이 탄핵소추 추진을 밝혔다(데일리안, 2026-02). 3월 25일에는 112명이 탄핵소추안 초안에 서명해 발의 정족수(재적 의원의 3분의 1)를 넘겼다(YTN, 2026-03-25). 사유는 이재명 대통령 공직선거법 상고심의 사전심리·절차 위반, 직권남용 등 6가지였다(같은 기사).
범여권 의원 모임 '공정사회포럼(처럼회)'이 국회에서 탄핵 관련 공청회를 개최했다(뉴시스, 2026-08-22). 탄핵 추진이 공식화된 자리였다.
정청래 민주당 대표가 자진사퇴를 연일 압박했다. "사퇴도 적절한 타이밍이 있다"며 거취 표명을 촉구했다(경향신문, 2026-03-04).
그러나 민주당 지도부는 공식적으로 거리를 뒀다.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당 지도부 차원에서 탄핵을 논의·계획한 바 없다"고 말했다(서울경제, 2026-03-04).
탄핵소추안은 의결되지 않았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퇴임하지 않았다. 법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선례라는 무기
한국 헌정사에서 법관 탄핵소추가 가결된 사례는 한 차례다. 2021년 2월 4일, 임성근 부산고등법원 부장판사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찬성 179명, 반대 102명, 기권 3명으로 가결됐다. 헌정사 최초의 법관 탄핵이었다(한국경제, 2021-02-04). 헌법재판소는 같은 해 10월 28일, 임기만료로 이미 퇴직한 점을 들어 재판관 5대 3으로 각하했다(법률신문, 2021-10-28).
탄핵은 실패했지만, 선례는 남았다. 국회가 법관을 탄핵소추할 수 있다는 것, 실제로 의결이 이루어졌다는 것, 다수당이 의지를 가지면 통과시킬 수 있다는 것.
조희대 대법원장에 대한 탄핵 추진은 이 선례 위에서 작동했다. 탄핵소추안이 의결되지 않았어도, "의결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가 메시지다. 한 번 뽑힌 칼은 칼집에 넣어도 기억 속에 남는다.

효과의 구조
탄핵이 의결되지 않았는데 효과가 있다는 주장은 과장처럼 들린다. 그러나 제도의 효과를 실행 여부만으로 판단하면 디테일을 놓친다.
사법부는 필터다. 행정부와 입법부가 원하는 것이 헌법에 맞는지 걸러내는 기관이다.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1835)에서 이 기능이 작동하는 조건을 한 가지로 좁혔다. 법관의 자리가 판결과 무관해야 한다. 판결 때문에 자리가 흔들리는 순간, 법관은 법 대신 정치를 읽는다.
탄핵 추진은 권력의 분리를 건드린다. 대법원장에게 탄핵을 추진하고, 공청회를 열고, 자진사퇴를 압박한 뒤, 소추안을 의결하지 않았다. 법적으로는 원점이다. 그러나 심리적으로는 원점이 아니다.
후임 대법원장은 이 전례를 안고 취임한다. 다수당이 불만을 품으면 탄핵을 추진할 수 있다는 것, 공청회와 언론을 통해 압박할 수 있다는 것. 소추안이 의결되지 않았어도, 그 과정 자체가 제도적 기억으로 남는다.
소웰은 《갈등의 비전》(1987)에서 이것을 '제약적 비전'의 문제로 설명했다. 인간은 유인(incentive)에 반응한다. 사람은 보상과 처벌의 구조에 따라 행동한다는 의미이다. 대법원장이 판결 방향에 따라 탄핵 압박을 받을 수 있다는 유인이 설정되면, 합리적 대법원장은 그 유인을 계산에 넣는다. 적극적으로 판단하면 탄핵 압박이 올 수 있고, 소극적으로 처리하면 올 가능성이 줄어든다. 어느 쪽이 안전한지는 계산이 필요 없다.
대법원장 교체와의 연결
이 압박을 대법관 증원과 함께 보면 구조가 선명해진다. 법원조직법 개정(법률 제21451호)으로 대법관 정원이 14명에서 26명으로 늘어났다. 새로 채울 자리가 12개다.
대법관 임명 절차를 짚어야 이 숫자의 무게가 보인다. 대법관은 대법원장이 후보를 제청하고, 국회 동의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다(헌법 제104조 제2항). 누구를 후보로 올리느냐가 사실상 인선의 핵심이다. 제청권은 대법원장에게 있다.
조희대 대법원장의 정년은 2027년 6월이다(보도 기준). 후임은 이재명 대통령이 임명한다. 그 후임 대법원장에게 12명의 제청권이 돌아간다. 26석 중 12석이다. 한 사람의 제청으로 대법원의 거의 절반이 교체된다.
탄핵 압박은 현직 대법원장에게 가해졌다. 그러나 진짜 압박을 받는 사람은 후임 대법원장이다. 현직에게 압박을 가하는 것은 후임에게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우리는 대법원장을 탄핵 추진할 수 있다. 이전에 한 적이 있다. 당신이 대법관 제청권을 행사할 때, 이 사실을 기억하라."
이것이 명시적으로 전달된 것은 아니다. 아무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도는 말로 작동하지 않는다. 유인 구조로 작동한다. 탄핵이 가능하다는 전례, 대법원장이 압박받은 기억, 그리고 제청권(대법관 후보를 국회에 추천하는 권한)을 가진 후임의 정치적 계산이 겹치면, 말하지 않아도 메시지는 전달된다.
가장 강한 반론
첫째, 탄핵은 헌법이 보장한 국회의 권한이다. 헌법 제65조는 대법원장을 탄핵 대상에 포함한다. 탄핵을 추진한 것 자체를 '압박'이라고 부르면, 헌법적 권한의 행사를 위축시킨다.
둘째, 조희대 대법원장의 상고심 처리에 실제로 문제가 있었을 수 있다. 탄핵 추진 측은 사전심리 절차의 운영, 특정 사건의 배당, 상고심 범위 일탈 등 5가지 사유를 제시했다. 대법원장은 상고심의 심리 절차와 사건 배당에 실질적 재량을 행사한다. 재량의 행사가 공정했는지 검증을 요구하는 것은 정당하다.
셋째, 탄핵이 무산됐다는 것 자체가 제도가 작동했다는 증거다. 여과장치가 극단을 걸러냈다. 탄핵 추진이 곧 탄핵은 아니다.
형식적으로는 맞다. 그러나 탄핵 추진이 무산된 뒤에 남는 것을 이 반론들은 설명하지 않는다.
반론 너머
탄핵이 헌법적 권한이라는 것은 맞다. 그러나 권한의 존재와 권한의 행사 방식은 다른 문제다. 칼이 있다는 것과 칼을 뽑아 보여주는 것과 칼로 찌르는 것은 각각 다른 행위다. 헌법이 보장하는 것은 칼의 존재이지, 칼을 뽑아 보여주는 것의 무해함이 아니다.
상고심 처리의 문제 제기는 정당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 제기의 형식이 탄핵 추진이어야 하는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질의, 국정감사, 공식 서면 요청 등 대법원장의 직무 수행을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은 탄핵 외에도 있다. 가장 극단적인 수단을 먼저 꺼내는 것은 견제가 아니라 위협이다.
루이스는 「처벌의 인도주의적 이론」(1949)에서 선의로 행사되는 압제가 가장 가혹하다고 경고했다. 피해자를 위해 행한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 압제를 가하는 쪽은 양심의 가책 없이 끝까지 밀어붙인다. 견제라는 명분이 있기에, 그 명분 아래에서 발생하는 위축 효과를 비판하기가 더 어렵다. "우리는 헌법이 보장한 권한을 행사했을 뿐"이라는 응답 앞에서, 위축 효과를 주장하는 쪽이 오히려 수세에 몰린다.
탄핵이 무산된 것은 맞다. 그러나 "무산됐으니 괜찮다"는 논리는, 미수범에게 "성공하지 못했으니 피해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구조다. 탄핵 추진 과정에서 소비된 정치적 자원, 그 과정이 법조계에 보낸 신호, 후임 대법원장에게 남긴 전례는 탄핵이 무산됐다고 해서 소멸하지 않는다.
뽑히지 않은 칼의 무게
하이에크는 《자유헌정론》(1960)에서 자유의 적이 권력 그 자체가 아니라 권력이 자의적으로 행사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라고 했다. 대법원장이 실제로 탄핵당했는가보다, 대법원장이 탄핵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공개적으로 시연됐는가가 더 중요하다.
한국에서 법관 탄핵의 선례는 이미 하나 있다(임성근, 2021). 대법원장에 대한 탄핵 추진이 공개적으로 진행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의결되지 않았어도, 추진 과정은 기록으로 남았다. 공청회는 열렸고, 대표의 발언은 보도됐고, 의원들의 참여는 집계됐다.
법왜곡죄(법률 제21450호)가 법관을 형사 고발의 대상으로 만들고, 대법관 증원(법률 제21451호)이 대법원의 인적 구성을 바꾸고, 검찰 해체(법률 제21065호·제21490호·제21491호·제21857호)가 공소 유지 기능을 재편하는 같은 시기에, 대법원장에 대한 탄핵 압박이 가해졌다. 각각은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각자의 이유가 동시에 같은 방향을 가리킬 때, 사법부의 구성원이 받는 메시지는 각자의 이유보다 크다.
탄핵이 의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추진 과정 자체가 제도적 기억으로 남는다. 뽑히지 않은 칼도, 다음에 뽑힐 수 있다는 기억을 남긴다. 그 기억 아래에서 판결하는 법관은, 판결이 아니라 안전을 계산한다. 사법부가 싸우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 있다.
참고 출처
- 범여권 탄핵 추진 경과: 13명 초기 추진(데일리안, 2026-02), 112명 서명으로 발의 정족수 초과(YTN, 2026-03-25). 사유 6가지(같은 기사).
- 공정사회포럼(처럼회) 탄핵 관련 공청회(뉴시스, 2026-08-22).
- 정청래 민주당 대표 자진사퇴 압박, "사퇴도 적절한 타이밍"(경향신문, 2026-03-04).
- 민주당 지도부 거리두기: 박수현 수석대변인 "지도부 차원 계획 없다"(서울경제, 2026-03-04).
- 임성근 부장판사 탄핵소추 가결(찬성 179, 반대 102, 기권 3), 한국경제, 2021-02-04. 헌재 각하(재판관 5인 각하, 3인 인용), 법률신문, 2021-10-28.
- 「법원조직법 일부개정법률」(법률 제21451호), 대법관 정원 14명 → 26명. 「형법 일부개정법률」(법률 제21450호), 법왜곡죄. 「정부조직법 일부개정법률」(법률 제21065호), 「공소청법」(법률 제21490호), 「중대범죄수사청법」(법률 제21491호), 「형사소송법 일부개정법률」(법률 제21857호). 국가법령정보센터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