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도 성경을 인용한다 : 왜곡의 원형, 그리고 성경의 자리를 대신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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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도 성경을 인용한다 : 왜곡의 원형, 그리고 성경의 자리를 대신한 것들


1부 — 왜곡의 원형

“악마도 자기 목적을 위해 성경을 인용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가 《베니스의 상인》 1막 3장에서 안토니오의 입을 빌려 한 말이다.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창세기 속 야곱 이야기를 이자를 받는 일을 정당화하는 데 끌어오자, 안토니오는 이를 웃는 얼굴의 악당과 썩은 사과에 빗댄다. 셰익스피어가 마태복음의 사건을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경을 자기 목적에 맞게 쓰는 장면의 뿌리는 광야 시험에 있다.

원형은 마태복음 4장, 예수의 광야 시험이다. 예수가 공적 활동을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 사탄에게 세 차례 시험받은 사건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 마태복음 4:6, 개역개정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 시편 91:11, 개역개정

사탄은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로 데려간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뛰어내리라”고 말하며, 성경을 근거로 댄다. 구약성경의 기도시 모음인 시편, 그중 91편이다.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지켜 주셔서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신다는 약속이다. 사탄의 논리는 이렇다. 성경은 하나님이 지켜 주신다고 말한다. 그러니 뛰어내려라, 하나님이 반드시 받아 주실 것이다.

그러나 시편을 펼치면 사탄이 뺀 말이 보인다. 하나님은 “네 모든 길에서” 지켜 주신다. 이 말이 약속의 조건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걸을 때 지켜 주신다. 스스로 위험을 만들어 놓고 구해 달라고 요구할 때가 아니다. 사탄은 성경을 통째로 부정하지 않았다. 자기에게 필요한 부분만 고르고, 걸리는 부분은 뺐다. 그렇게 하나님의 보호 약속을 “그러니 뛰어내려도 된다”는 말로 바꿨다. 가장 교묘한 왜곡은 말을 전부 바꾸는 데 있지 않다. 필요한 말만 남기고 나머지를 지우는 데 있다.

예수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예수는 “성경을 인용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인용 자체를 의심하지도 않았다. 대신 구약성경의 또 다른 책인 신명기 6장 16절을 들어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답한다.

두 구절을 나란히 놓으면 속임수가 보인다. 시편은 하나님을 믿고 자기 길을 걷는 사람을 지켜 주신다고 약속한다. 하나님이 나타나시는지 보려고 위험에 뛰어들어도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탄은 그 약속을 내기로 바꿨다. 뛰어내려라, 약속대로 받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보호를 믿는 것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신명기가 바로 그 차이를 짚는다. 예수는 한 구절로 사탄이 시편을 어떻게 비틀었는지 드러냈다.

교훈은 분명하다. 왜곡된 인용에 맞서는 길은 인용을 통째로 버리는 데 있지 않다. 그 말이 원래 무슨 뜻이었는지 묻고, 앞뒤 내용과 가르침 전체에 비추어 읽는 데 있다.

교회 역사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됐다. 1517년 독일에서는 면죄부(죄에 따르는 벌을 돈으로 면해 준다며 팔던 증서다)를 파는 설교가 퍼졌다. 이 판매 수입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비와 마인츠 대주교의 빚 문제가 얽혀 있었다. 요한 테첼은 그 설교자로 활동했다. 루터는 95개조 27항에서 “돈이 궤에 울리자마자 영혼이 연옥에서 나온다”는 식의 설교를 비판했다. 연옥은 가톨릭 교리에서 죽은 이가 천국에 들어가기 전 죄를 씻는 곳이다. 루터는 그런 가르침은 사람이 만든 말이라고 했다. 루터가 문제 삼은 것은 성경이 아니었다. 회개와 용서를 돈으로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식의 설교였다. 그가 맞선 것은 성경이 아니라, 성경을 잘못 읽는 방식이었다.

마녀재판은 성경의 권위가 폭력에 쓰인 사례다. 1641년 매사추세츠만 식민지의 《자유권 장전》은 주술을 사형으로 다루면서 출애굽기 22장 18절과 신명기 구절들을 근거로 적었다. 성경 구절 하나가 마녀재판을 낳았다는 뜻은 아니다. 당시의 공포, 재판 제도, 고문과 자백이 함께 성행했다. 면죄부가 거룩한 권위로 돈을 거둔 사례라면, 마녀재판은 그 권위로 폭력을 옳은 일처럼 꾸민 사례다.

여기서 분명히 할 것이 있다. 이 역사에서 얻을 교훈은 “성경은 위험하다”가 아니다. 예수도 루터도 성경을 버리지 않았다. 성경 안에서 답을 찾았다. 성경을 지키는 길은 성경을 떠나는 데 있지 않다. 성경을 바로 읽는 데 있다. 물어야 할 것은 “인용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뺐는가, 그 말이 원래 뜻과 맞는가”다.

이 패턴은 교회 안에서 끝나지 않았다. 오늘날 사회에서도 똑같이 일어난다. 면죄부 판매상은 사라졌지만 그 화법은 살아남았다. 오늘날 헌법과 통계, 전문가의 말도 때로는 성경 인용과 비슷한 방식으로 쓰인다.

신명기 4:2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신명기 12:32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찌니라

2부 — 성경의 자리를 대신한 것들

앞에서 본 패턴은 간단하다. 사탄은 성경을 부정하지 않았다. 자기에게 필요한 부분만 골랐다. 면죄부 설교는 거룩한 말을 돈과 잘못된 확신에 붙였다. 마녀재판에서는 성경 말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법의 한 근거가 됐다. 문제는 권위 자체가 아니라, 권위를 쓰는 방식이었다. 면죄부 판매상은 사라졌다. 그러나 그 화법은 살아남았다.

우리 사회의 논쟁에서 헌법, 통계, 전문가의 말은 중요한 기준이다. 물론 이 셋은 성경과 같은 종류의 권위가 아니다. 헌법은 사회의 기본 규칙이고, 통계는 현실을 재는 숫자이며, 전문가는 자신의 근거를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헌법 정신에 따르면”, “통계가 보여주듯”, “전문가들이 말하듯”이라는 말이 토론을 시작하는 말이 아니라 끝내는 말로 쓰일 때가 있다. 문제는 권위가 아니라, 권위를 방패로 삼는 태도다.

미국의 경제학자 토머스 소웰은 이런 태도를 비판하며 “the anointed”라는 말을 썼다. 자신들만 세상을 고칠 답을 안다고 믿는 지식인, 언론인, 정치권을 가리킨 말이다. 그가 문제 삼은 것은 근거가 있느냐 없느냐보다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 자료를 만났을 때의 태도다. 자기 생각에 맞는 자료만 고르고, 맞지 않는 자료는 아예 보지 않는 순간 인용은 생각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아니라 책임을 피하는 말이 된다. 이런 유혹은 어느 진영에나 있다.

한국의 논쟁도 예외가 아니다. 헌법 제119조는 좋은 예다. 조문을 직접 읽어 보자.

①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②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어떤 이는 1항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만, 다른 이는 2항의 “경제의 민주화”만 끌어온다. 하지만 1항만 읽으면 국가가 정해진 목적을 위해 경제를 조절할 수 있다는 2항을 잃고, 2항만 읽으면 자유와 창의를 기본으로 삼는 1항을 잃는다. 광야에서 “네 모든 길에서”를 뺀 것과 똑같은 수법이다. 두 항은 함께 읽어야 한 조문이 된다. 한 문장만 들고 상대를 침묵시키려는 순간, 이 글도 비판하는 선택 인용을 되풀이하게 된다.

통계도 마찬가지다. 취업자 수가 늘었다고 해서 청년 일자리나 근로시간까지 좋아졌다는 뜻은 아니다. 서로 다른 숫자는 서로 다른 질문에 답한다. 어느 한쪽이 자동으로 거짓이라는 뜻도 아니다. 숫자를 인용할 때는 언제와 비교했는지, 전체 몇 명을 기준으로 셌는지,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부분을 따로 계산한 수치인지 함께 밝혀야 한다. 그래야 숫자가 말해 주는 범위를 알 수 있다.

왜곡의 수법은 다섯 가지다.

  • 내게 유리한 문장만 떼어 쓴다.
  • 그때그때 한 말을 언제나 맞는 규칙처럼 쓴다.
  • 결론을 먼저 정하고 근거를 찾는다.
  • 근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이 옳다고 말한다.
  • 숫자의 기준이나 기간을 바꿔 다른 이야기를 같은 답처럼 보이게 한다.

광야의 시험에서 보인 선택과 생략은 오늘의 화면에서도 낯설지 않다.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이 유혹 앞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진영은 없다. 좌우 어느 쪽에도 확신은 있고, 자기에게 유리한 인용을 고르고 싶은 마음도 있다. 차이는 확신이 얼마나 강한가에 있지 않다. 틀렸을 때 고칠 준비가 되어 있는가에 있다. 내가 든 인용을 원래 글과 처음 나온 자료에 비추어 검증받을 수 있는가. 내 생각과 맞지 않는 자료와 다른 의견을 받아들일 길을 열어 두는가. 여기에 “아니오”라고 답하는 쪽이 어디든, 그쪽이 바로 광야에서 사탄이 쓴 방법을 쓰고 있는 것이다. 필요한 말만 남기고, 걸리는 말은 지우고, 원래 뜻을 확인하자는 요청은 모두 거부하는 방식이다. 그 사람이 어느 진영에 서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인용을 어떻게 다루는지가 중요하다. 질문을 멈춘 쪽이 지는 쪽이다.

그렇다면 답은 무엇인가. 아무것도 믿지 말라는 태도는 답이 아니다. 헌법이 선택적으로 쓰인다고 헌법을 버리고, 통계가 왜곡된다고 숫자를 버리고, 전문가의 말이 남용된다고 전문가를 무시하면 더 센 목소리만 남는다. 대신 각각에 맞는 방법으로 확인해야 한다. 헌법은 조문 전체를 읽고, 통계는 처음 나온 자료와 계산법을 보고, 전문가의 말은 근거와 다른 의견을 살펴야 한다.

성경은 이 태도의 좋은 본보기도 보여 준다. 사도행전의 베뢰아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말을 들으면서도, 그것이 맞는지 날마다 성경을 살폈다. 그들은 권위를 조롱하지 않았지만 권위 앞에서 생각을 멈추지도 않았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도 같다. 헌법을 인용하면 조문 전체를 읽고, 통계를 인용하면 기간과 기준을 보고, 전문가를 인용하면 근거와 다른 의견을 함께 확인하는 일이다.

인용은 결론이 아니라 확인의 시작이다. 권위는 빌릴 수 있어도, 정직함은 빌릴 수 없다.

사도행전 17: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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