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초과"를 정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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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과이익환수제, 그 발상의 함정


2026년 5월 12일, 코스피는 580포인트 가까이 출렁였다. 개장 직후 7,999.67까지 올랐던 지수가 장중 7,421까지 밀렸고, 외국인은 하루에만 5조 6,077억 원을 순매도했다. 블룸버그는 이 변동성의 주요 원인으로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의 페이스북 글을 지목했다. 그 글은 AI 시대가 만들어낼 '구조적 초과세수'를 국민에게 배당하는 방안을 검토하자는 내용이었다.

정부는 즉시 해명에 나섰다. 이재명 대통령과 청와대는 "기업의 초과이윤을 환수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미 걷힌 초과세수를 어떻게 사용할지 고민하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시장은 그 정정에도 흔들렸다. 세법 조문의 미묘한 차이가 아니라, 정치가 보내는 신호를 읽었기 때문이다. 호황기의 이익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정치가 사후에 개입할 수 있다는 신호 말이다.

이 신호는 2011년 '초과이익공유제'와 같은 계보에 속한다. 정운찬 전 총리는 최근 칼럼에서 자신의 2011년 모델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자율적인 성과 공유였고, 이번 국민배당금 구상은 재정 배분의 문제라고 구분했다. 법적 구조와 정책 수단은 분명히 다르다. 그럼에도 시장이 우려하는 것은 그 차이가 아니라, '성공이 지나치게 크면 일부를 정치적으로 재배분할 수 있다'는 현 정부의 발상이다.

1.초과는 누가 정하는가.


이익을 "정상"과 "초과"로 명확히 나눌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이익은 위험을 감수한 대가이자, 불확실한 미래에 자본을 묶어 둔 보상이다. 반도체 기업이 호황기에 큰 이익을 내는 것은 불황기에 감내한 손실과 투자 공백의 대가다. 그 경계를 정치가 사후에 긋는 순간, "적정 이익"의 기준은 관료와 정치인의 판단에 맡겨진다. 토마스 소웰이 경고한 '선각자의 비전'이 작동하는 지점이다. 회사의 이익은 나라의 것이 아니다.

2.가격 상승을 막는 일이다.


호황기의 높은 이익은 단순한 성공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과 인재, 공급망을 그 산업으로 끌어들이는 강력한 신호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큰 이익을 내는 동안 소재·장비·전력 인프라 기업들이 모이고, 인재가 유입되며, 해외 자본이 한국을 주목한다. 환수 논리는 이 신호를 정치적 판단으로 가로막는 행위다. 시장이 "여기로 오라"고 외칠 때, 정치가 "그만 오라"고 말하는 셈이다.

3. 위험과 보상의 비대칭이다.


기업이 망할 때 정부가 주주의 손실을 보전해주는가? 그렇지 않다. 그런데 이익이 클 때는 "초과"라는 이름으로 사후에 개입하려 한다. 손실은 민간이 온전히 부담하고, 이익만 정치가 재분배의 대상으로 삼는 구조다. 이는 사전에 법으로 정해진 정상 과세와 다르다. 사후에 특정 산업과 시기를 골라 경계를 긋는 행위는 예측 가능성을 해치고, 자본의 요구수익률을 높인다. 그 비용은 결국 일자리와 투자 축소로 이어진다.

4.이미 다른 나라에서 해봤다


영국의 1997년 민영화 유틸리티 횡재세는 약 52억 파운드의 세수를 거두었고, 시장이 미리 주가에 반영했다는 평가도 있다. EU의 2022년 화석연료 연대 기여금 역시 260억 유로 이상을 징수하며 일정 정도의 재정 효과를 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2023년 은행 횡재세는 은행들의 강한 반발과 제도 수정 끝에 사실상 유명무실해졌고, 정부는 거의 세수를 거두지 못했다.

이 사례들이 공통으로 보여주는 것은 세수의 성패가 아니다. 정부가 호황기의 이익을 "초과"로 규정하고 정치적으로 재배분할 수 있다고 선언하는 순간, 시장은 다음 호황의 소유권을 의심한다는 점이다. 정치가 얻는 것은 때로는 세수이고, 언제나 "사후 개입이 가능하다"는 서사다. 그 대가는 산업이 치른다.

여기서 핵심은 이름이 아니다. "초과이윤"이든 "초과세수"든, "환수"든 "배당"이든, 본질은 이익이 일정 선을 넘으면 정치가 사후에 개입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에 있다. 2011년 이건희 삼성 회장이 "이익공유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했을 때, 그는 단순히 용어를 몰라서가 아니었다. 호황기 이익을 "초과"라고 부르는 언어가 불황기 손실을 어떻게 다룰지, 그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정운찬 전 총리가 자신의 과거 모델과 현재 구상을 구분한 것을 보자. 그러나 두 아이디어는 여전히 하나의 위험한 언어를 공유한다. 성공이 지나치게 크면 그 일부를 정치가 가져갈 수 있다는 전제다. 그 전제가 정책 언어로 살아 있는 한, 다음 호황은 언제든 다음 개입의 명분이 된다. 시장이 이를 '사회주의적 개입'으로 읽는 이유다.

회사가 창출한 이익은 주인 없는 돈이 아니다. 그것은 위험을 감수하고 자본을 투입한 주주에게 마지막으로 돌아가는 잔여 청구권이다. 정치는 이 잔여분에 가장 손쉽게 숟가락을 얹을 수 있는 도구를 알고 있다. 바로 "세금"과 "초과"라는 이름이다. 평소의 세금은 법 절차의 정당성을 빌려 오지만, "초과이익" 과세는 그 정당성을 이름에서 빌려 온다. "초과"라는 단어 하나로 합의 없이 자금 이동이 가능해진다.

정치가 이 유혹에 빠지는 이유는 단순하다. 큰 이익을 내는 산업의 표는 적고, 그 이익을 나눠 받을 다수의 표는 많기 때문이다. "초과이익"은 이 거래에 정당성의 언어를 제공한다. 그러나 시장은 학습한다. 한 번 자신의 정당한 몫이 정치적 판단에 따라 의심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자본은 다음 기회에 한국을 떠난다. 정치가 얻은 표는 일회적이고, 떠난 자본과 투자는 영구적이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일은 화려해 보이지만, 결국 알을 낳을 거위를 잃는 결과로 이어진다. 주주에게 돌아갔어야 할 이익은 다음 일자리와 다음 R&D, 다음 협력업체의 종잣돈이었다. 그것을 정치가 표로 환산해 가져가는 순간,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것은 그 표를 던진 다수 자신이다. 미래 세대의 몫을 미리 빼앗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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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