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을 위한다는 말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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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왕과 좌파의 공통점 —

진짜 민주공화국은 그냥 다수결로 되는 게 아니다. 자기 머리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이 제 판단으로 움직일 때, 그때서야 제대로 돌아간다. 다수결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다수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그 결정이 개인의 자유를 어디까지 침해하는지가 핵심이다.

미국 헌법을 설계한 매디슨이 연방주의자 논고 10편에서 말한 것도 결국 그거였다.

순수 민주주의는 파당의 폐해를 막을 방법이 없다.
JAMES MADISON · Federalist No. 10, 1787

한국 헌법 1조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냥 민주주의가 아니라 공화국. 이 차이를 요즘은 너무 쉽게 잊는다.

그런데 지금 좌파가 만들어내는 장면을 보면, 그들은 사유하는 시민을 원하는 게 아니라 동원하기 쉬운 군중을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감정과 피해의식, 그리고 도덕 프레임

좌파가 사람을 움직이는 방식은 대충 이렇다. 먼저 감정을 자극한다. 분노든 공포든 연민이든, 뭐든 상관없다. 그 다음엔 "너희가 이렇게 된 건 누가 빼앗아갔기 때문"이라는 피해의식을 심어준다. 마지막으로 선과 악을 나눈다. 우리는 정의, 너희는 악. 여기까지 오면 토론은 끝이고, 그냥 따라오라는 얘기밖에 안 남는다.

이 단계가 끝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이라는 건 애매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일인데, 그 세계엔 애매한 게 없다. 흑 아니면 백, 우리 아니면 적.

경제학자 토마스 소웰이 지적한 대로, 데이터보다 스토리가 앞서고, 결과보다 의도가 중요해지며, 논쟁 대신 도덕적 우위를 선언하는 순간 모든 게 끝난다.

해법은 없다, 트레이드오프만 있을 뿐이다.
THOMAS SOWELL · The Vision of the Anointed, 1995

자유로운 사회는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 어떤 정책이든 비용이 있고, 그 비용을 누가 치르는지 따져야 한다. 그런데 "이건 정의의 문제야"라고 선언하는 순간, 비용을 계산하자고 하는 사람은 비도덕적인 인간이 된다. 토론은 거기서 끝난다.

조선 왕들도 똑같았다

조선 왕들 교서를 보면 한결같이 "백성을 불쌍히 여긴다", "백성의 고통을 헤아린다"는 말이 나온다. 말은 그럴듯하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왕은 언제나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고, 백성은 그저 보호받아야 할 대상일 뿐이다. 백성이 뭘 원하는지 묻는 게 아니라, 왕이 "너희에게 이게 좋다"고 정해주는 구조다.

지금 좌파가 하는 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토크빌이 200년 전에 이미 경고한 그 모습 그대로다.

시민들 위로 거대한 후견 권력이 솟아오른다. 절대적이고, 세밀하며, 규칙적이고, 빈틈없고, 온화한 권력이다. 그것은 사회의 표면을 작고 복잡한 규칙들의 그물망으로 덮는다. 부모의 권위를 닮긴 했지만, 부모와 달리 시민을 영원한 유년기에 묶어두려 한다.
ALEXIS DE TOCQUEVILLE · Democracy in America, Vol. 2, 1840

"서민을 위해", "노동자를 위해", "청년을 위해"라는 명분으로, 실제로는 시민이 스스로 결정할 영역을 하나씩 줄여나간다. 학교 선택권, 임대 조건, 노동 시간까지. 국가가 "너를 위해" 대신 정해주는 방향으로 간다.

밀턴 프리드먼이 평생 물었던 질문이 여기서 다시 떠오른다.

누구의 돈으로, 누구를 위해, 누가 결정하는가?
MILTON FRIEDMAN · Free to Choose, 1980

자기 돈을 자기가 쓸 때가 제일 효율적이다. 남의 돈으로 남을 위해 결정할 때가 제일 비효율적이다. 그런데 좌파 정책은 거의 예외 없이 후자에 가깝다. 결정하는 사람들은 "우리는 너희를 위해 하는 거야"라고 말한다. 조선 왕들이 하던 그 태도와 별로 다르지 않다.

C.S. 루이스가 한 말도 비슷한 맥락이다.

온갖 폭정 가운데, 희생자들의 선을 위해 진심으로 행해지는 폭정이 가장 가혹하다. 강도 남작 아래 사는 것이 전능한 도덕적 참견꾼 아래 사는 것보다 차라리 낫다.
C.S. LEWIS · God in the Dock, 1970

강도 남작은 적어도 지치기라도 한다. 하지만 네 양심을 위해 너를 다스리겠다는 사람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안다 vs 모른다

하이에크는 좌파 사상의 가장 큰 문제를 '치명적 자만'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다 안다는 오만. 사회 전체를 설계할 수 있다는 믿음.

그가 직접 이렇게 적었다.

경제학의 기이한 과제는, 인간이 자기가 설계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에 대해 자기가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FRIEDRICH HAYEK · The Fatal Conceit, 1988

하지만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시장이 위대한 이유는 정답을 안다고 주장해서가 아니라, 모른다는 걸 인정하고 수많은 사람의 판단이 부딪히게 두기 때문이다.

좌파 동원의 세계는 정반대다. 우리는 안다. 너희는 모른다. 그러니 우리를 따르라.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말은 쓰지만, 실제로 만들어내는 건 지시받은 대로 분노하는 인간이다. 자기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 정해진 적을 향해 정해진 감정만 쏟아낸다.

이건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형식만 민주공화국일 뿐, 실상은 인민독재에 가깝다. 다수가 동의했다고 해서 그 결정이 자동으로 정당해지는 게 아니다. 중요한 건 그 다수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 결정이 법의 한계를 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한 사람의 사유가 시작이다

민주공화국을 지킨다는 건 제도를 지키는 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판단하는 힘을 지키는 일이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강요된 도덕에 휩쓸리지 않고, "우리가 다 안다"는 사람들에게 "너는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힘.

자기 돈은 자기가 쓰고, 자기 자녀는 자기가 가르치고, 자기 의견은 자기가 만드는 사람. 정부가 "너를 위한다"고 할 때마다 한 번 더 물어보는 사람.

그 질문을 멈추지 않는 한, 우리는 아직 조선의 백성이 아니다.

조선은 결국 망했다. 그렇게 백성을 위한다던 왕들은 정작 그 백성을 지키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 헌법 제1조